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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비망록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 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잇몸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

시의 향기 2004.09.06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시의 향기 2004.09.06

제주도 여행 -3.첫날 오전.

피곤한 몸이었지만.. 다들 들뜬 마음으로 선착장으로 나갔다. 우리가 탄 화물선(?)에 비해 상당히 작은 배가 하나 떠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곱시 반이군. 이틀 뒤에 우리가 타고 떠날 제주도발 목포행 배다. 저녀석은 정시에 도착하는 데 우리는 이게 무어란 말인가. 일출을 볼 때 즈음에 섬에 다다라서 곧 내렸어야 했건만 한시간여나 늦은 셈이다. 하지만 괜찮다 어쩌겠는가, 여행은 원래 그런 것이다. 계획대로 꽉 짜여진 여행을 좋아하는가? 가령 지금 내가 여행중이라고 하면 오늘 오후 네시에 내가 어디에 있을 지 미리 알 수 있는 그런 여행 말이다. 그건 여행이 아니다. 그건 그저 쳇바퀴도는 일상의 다른 이름일 뿐이지 , 진정한 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맞딱뜨리는 데 있다. 너무 무계획인 여행은 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