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라도 다녀오자

제주도 여행 -3.첫날 오전.

풍경소리 2004. 8. 29. 22:51

피곤한 몸이었지만..
다들 들뜬 마음으로 선착장으로 나갔다.
우리가 탄 화물선(?)에 비해 상당히 작은 배가 하나 떠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곱시 반이군. 이틀 뒤에 우리가 타고 떠날 제주도발 목포행 배다.
저녀석은 정시에 도착하는 데 우리는 이게 무어란 말인가. 일출을 볼 때 즈음에
섬에 다다라서 곧 내렸어야 했건만 한시간여나 늦은 셈이다. 하지만 괜찮다
어쩌겠는가, 여행은 원래 그런 것이다.

계획대로 꽉 짜여진 여행을 좋아하는가? 가령 지금 내가 여행중이라고 하면 오늘 오후
네시에 내가 어디에 있을 지 미리 알 수 있는 그런 여행 말이다. 그건 여행이 아니다.
그건 그저 쳇바퀴도는 일상의 다른 이름일 뿐이지 , 진정한 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을 맞딱뜨리는 데 있다. 너무 무계획인 여행은 다니는 게 힘들겠지만 ,꽉 짜여진
여행은 여행의 의미가 없다. 뭔가 의외성과 새로운 사건을 만나야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
정해진 계획대로, 정해진 코스대로 돌아보고 그저 기념 사진이나 한 장 찍고 돌아오려는
거라면 차라리 조용히 집에서 비디오나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고생도 하지 않고
훨씬 더 낯선 풍경과 상황에 -물론 수동적으로 -놓일 수 있으니.

제주도 도착은 원래 계획보다 이미 한나절 늦은 상태였다.(원래 계획이었다면
목요일 오후에 도착했어야 했으니) 거기다가 원래 배가 도착하기로 한 시간보다
한참 늦은 여덟시 경에나 우리는 제주도의 땅을 밟을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나름대로
꽤 계획에서 어긋 난 게 아닐까? 뭐, 굳이 문제라면 제주도 땅을 밟고 나서의 명확한
시간에 따른 계획이 없었으니. 이 점이 너무나 행운이었다. 아무도 조급해하지 않았고
아무도 늦었다는 걸 신경쓰지 않았으니. 여객 터미널 안의 렌트카 삐끼 아저씨들을 헤치고
성재와 유호는 렌트카를 가지러 예약한 렌트카 사무실로 향했고 남은 셋은 천금같은
시간을 여유만만하게 하릴없이 대합실에서 뒹굴거리면서 그저 제주도 여행 책자를 펴
보기만 했다. 무계획의 여유로움이여... 앞의 둘이 한참동안 보이지 않았고 배가 내린 후
한참이 지나자 사람들도 다 떠나갔지만 그냥 좋았다. 시간이 아홉시를 가리켜도
그냥 배 여행으로 피곤해진 몸을 슬쩍 뉘였을 뿐.

드뎌 렌트카가 왔다. 짐을 싣고 출발. 앗 이게 아니지, 그러고 보니 배가 너무 고프다
우리의 주식을 빵과 우유 그리고 라면으로 설정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 중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 뭐라도 사 먹어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슈퍼를 물색하였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정도야 샀지만 이걸로는 한참이 부족하던 차에 오른쪽에 스쳐지나가는 E마트
저거다.!!! 저기로 가는 거야~~ E마트에 가기 위해 다시 방향을 틀었다. 한데..
E마트 가기가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주차장에 가기 위해서 세 번이나 그 주변을 돌아야
했다. 결국에는 아마 주차장 입구를 못 찾아서 그 옆의 공영주차장에 세웠다는 슬픈
사연이 있기도 했고. 겨우 입구에 들어섰더니 아홉시 오십칠분. E마트 영업 시작시간은
열시 였다. 빙빙 돌아 다닌 게 되려 복이 된 건가.

어느 덧 열시
주차장에서 시원한 우유와 빵을 먹고 허기를 대충 채운 후 다시 길을 떠났다.
제주도 초입의 상징이라는 용두암이 첫째 목표였다. 역시나 초행인지라
길을 또 한번 헤매게 되었고 ,슬쩍 뒤로 지나치는 용두암 앞의 주차장은
거기에 갈 의지를 꺾게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별로 멀지 않은 바로 이 지점에서도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보 봐서는 용두암 자체가 매우 작을 거라는 추측을
쉬이 내리게 했고, 별다른 미련없이 용두암을 뒤로하기로 했다.

해변

전체적인 여행의 개요는 제주도를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해안도로를 다라 제주도를 반만큼 돌아 남쪽의 중문 관광단지에서 일박을 하는
것이 첫날 제주에서의 확정된 여행계획의 전부였다. 정재가 찍어둔 곳과 배에서
할아버지가 찍어주신 곳 몇몇이 대충의 목적지이긴 했으나 절대적으로 확정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냥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을 뿐.

해안도로로 나서자 제주의 바다가 활짝 펼쳐졌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맑은 하늘,
푸른 바다. 그리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제주의 낯선 해변. 산골 출신이라 원래
바다라는 것 자체에 익숙하지 않ㅎ지만 제주의 바다는 더욱 특별했다. 과학시간에
자주 나오던 현무암을 기억하는가? 화강암과 늘 비교되는 '화산암'인 현무암. 용암이
분출해서 지표 근처에서 식어 만들어졌다는 검은 색의 돌. 구멍이 많고 단단하다던
그 돌. 과학시간에나 잠깐 설명이 나오고, 과학실에 조그만 덩이의 표본으로 어둠속에
갇혀 있던 그 자그마한 돌들이 마구마구 자기 몸집을 키워서 섬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막 해안도로로 나섰을 때 모두 기쁨의 탄성을 질렀고, 싸구려 스피커에서 나오는
흥겨운 음악을 들으며 더욱 분위기에 취했다. 마구 달리다가 그냥 해안가에 차를 대고
차에서 내려 해변으로 나갔다.

단 한덩이의 돌로 이루어진 듯한 해변, 검은 해변을 하이얀 물결이 쓰다듬고 지나간다.
현무암의 검은 구멍사이에 물결은 자그마한 거품을 남기고 뒤로 사라지고 검은 바위는
다시 햇살에 나신을 드러낸다. 햇살이 거품 아래의 바위를 비추면 뒤로 물러나 사라진
줄 알았던 파도가 어느 새 다가와 바위를 다시금 부드럽게 쓰다듬어준다.
하이얀 바다와 검은 바위에서 눈을 떼면 그제야 풍경에 눈이 들어온다. 흰빛으로만
느껴졌던 바다는 고개를 듦에 따라, 점점 짙은 청색을 띄고 흰 바다 덕분에 잘 보였던
바다 밑의 검은 현무암들도 서서히 그 빛이 줄어들어 마침내 바닷속으로 조용히 제
모습을 감춘다. 이제 탁트인 바다다. 얕은 파도가 햇볕을 반사하고 너무나 시원한
가슴이 탁 트이는 청색이 내 눈을 통과한다. 확트인 바다에서 내 시계를 방해하는 것은
그저 운치있게 조용히 지나가는 배 한 척뿐. 가슴이 터질듯한 시원한 바다의 긑에선
하늘이 시작되고 있었다. 짙은 푸르름의 바다와 너무나 맑은 하늘이 만나는 그 경계
태풍이 어루만져주고 간 깨끗한 하늘 가을 햇살같은 그 푸르름 사이에 분위기에 취해
미쳐 태풍을 따라가지 못한 듯 하이얀 구름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완벽한 풍경이다.
멋진 풍경이야 많겠고, 이것과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으로 완벽한 풍경도 많겠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풍경만으로도 제주도
여행을 시작한 의미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기쁨에 겨워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즐거워 하고, 행복을 만끽한 후 다시 차에 올랐다.
창밖에는 날 행복에 빠지게 한 경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우리는 행복을 옆에
끼고 해안도로를 쭈욱 따라갔다.

또 한 번 차를 더 세운 이유는 역시나 해변의 풍경 때문이었다. 해녀상이 있던
어느 해변가 절벽 옆에 차를 세우고는 다시 아까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반복했다.
절벽보고 신기해하고 하늘보며 기뻐하고 바다보면서 행복해 하기.

두 번의 해안을 지나치자 이제야 왼쪽의 제주도 땅에 눈길이 간다. 화강암으로 둑을
쌓아놓은 제주도의 밭. 붉은 색을 띄는 특이한 토양. 저 돌들을 들어내서 밭을 만들며
농부들은 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했을까? 돌 하나하나의 무게만 해도 상당할 터인데
어찌저리 둑을 높이 쌓았을까? 그저 땅을 한 뼘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아니면 정말
바람을 막귀한 돌둑일까? 그러고 보니 저 돌들은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참 굳건하게도
서 있군.

서쪽으로 갈 수록 제주도의 바다는 푸른색에 맑은 흰색의 물감을 서서히 타고 있었다.
그러더니 협재 해수욕장이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흰 모래가 있는
해수욕장이라고, 바다가 정말 에메랄드 빛이라고, 아까의 그 해변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성재는 누누이 말을 했었다. 성재의 말을 다 믿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말에 전혀 신경 안 썼다는 건 더욱 거짓말일 테다. 한데 내 눈에 들어온
협재의 모습. 뭐랄까? 첫인상은 분명히 부족했다. 성재가 그렇게나 자랑하던 비취빛
바다, 그게 문제였다. 태풍의 여력이 아직 남아서인지 바닷물은 뭔가 뭐르게 탁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그 덕분에 맑디맑은 비취빛이 되어야 할 바다가 그 맑은 느낌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트집거리 일 뿐.
성재의 말이 옳긴 했따. 그저 처음 마주친 해변의 인생이 너무나 강렬해서 내가
굳이 부정하고 있는 중일 뿐이다.

누구의 말에 의하면 우도의 바다가 정말 비취빛 환상의 느낌이라고 한다. 결국
우도는 못 가봤기 때문에 우도의 바다가 얼마나 환상적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협재의 바다도 , 우도 만큼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환상적이었다. 하얀 모래에 얕게
펼쳐진 비취빛의 바다가 쭉 이어졌고 바다가 원래의 푸른 색을 되찾을 쯤한 거리에는
섬이 하나 자릴잡고 있었다. 자그만 하지만 충분히 운치있을 정도의 크기의 섬이었다.
배경으로 사진 찍기 딱 좋을 정도의 풍경이었다. 해수욕장의 끄트머리에서 샌들을 벗고
흰 모래를 발가락 사이로 느끼며 반대편 해수욕장으로 걸어갔다. 푸른 바다와 멋진
해변에 유일한 흠이라면 사람들...휴가철을 지나긴 했으나 해수욕장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불행히도 가족단위- 애들이 흥겨이 노는 통에 분위기 잡으면서 모래사장을
걷기는 글른 듯 했다. 협재의 모래사장은 의외로 짧았고 그 끝에는 여느 다른 제주도
의 해안가처럼 현무암 바위기 시작되고 있었다. 맨발로 사뿐사뿐 바위를 밟고 건너편
섬을 향해 몇 걸음 나서서 다시금 풍경을 살펴 보고는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