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호흡

아주 신씨 (鵝州申氏)

풍경소리 2006. 1. 2. 18:35
족보를 믿는가?

사실, 난 안믿는다.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양반 비율의 변천사를 알고서부터는 그걸 믿을 수가 없다.
과연 지금 사람들 중에 '진짜' '족보' 있는 양반집 자손은 몇이나 될까?

회사를 아니가서 할 일이 없는 관계로 ,
갑자기 어제 본 영화에서 연산군 선왕이 누구였더라라는 의문이 들어서 검색을 하다보니
구글에서 저런 검색어(아주 신씨)까지 쳐보게 되었다.

사실 시조가 누군지 잘 모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울마을(?) 종손이라고 하지만,
나같이 시니컬한 사람에겐 그런 건 짐일 뿐, 뿌리찾기는 정말 성가신 일일 뿐이기에.
그저 '신숭겸'쯤되려나 생각했더니...
찾아보면 찾아 볼 수록 되려 더 아리까리하기만하다.
원래 평산신씨에서 분가(?)해온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껏 아주신씨는 평산신씨에서 분가해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색결과는
말 그대로 아리까리 그 자체. 알 수 없음.-a-)
그냥 막 신씨를 만들어버린 것인지....

그리고 또 느낀 건,
진짜 어쩌면 내가 양반집 자손이 맞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사실.--a
집성촌이라고 나온 동네 네개가 다 근처고(의성군0
세 개가 내가 아는 동네다.
물론 그 동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몽땅 같은 핏줄로 한꺼번에 족보를 위조했을 수도 있다.
실제 족보 시조상의 인물의 자손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집성촌을 이루고 그 인물을
시조로 삼고 살 가능성도 너무나 높다만....

몇달 전에 들었던 '내가 어렸을적엔~'으로 시작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다시금 생각이 나는 군.
아버지가 어렸을 때까지만해도 앞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다 말을 놨다더군.
상놈들이라고.--a
그 전 세대에는 그 마을 사람들을 부려먹었다더군. 양반이니까 상놈들을 부려먹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고...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뭐 그랬다던데 어쩌겠어?...

그렇게 부려먹었다고 꼭 진짜 순혈(?) 양반이었단 법은 없었잖아?
그리고, 설사 양반이었다면 뭐 어쩔꺼야?
어차피 무지렁이 농촌 출신인걸..
(굳이 차이를 들자면, 울 동네 사람들의 교육열 정도가 될까?
울마을 분들은 유별나게 교육열이 강하다.바로 옆마을과 비교해도 상대가 아니 될정도로.)

그래서 어쩌라고?--a
양반집 자손이니 뛰질 말까?
밥을 먹질 말까.. ^^;;;
아무소용 없는 걸.
집에 고서가 있는 것도,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닌걸....

ps) 내가 놀랜 집성촌 부분:
3> 집성촌

경북 의성군 사곡면 매곡동
(사곡엔 선산이랑 문중문답이 있다...)

경북 의성군 의성읍 팔성동
(예전에 울 조상님네들이 원래 이 옆동네에 계셨다군.
그런데 왜 우리마을로 이사왔냐고? 여기 의성시장 들어선다고 해서..
양반이 시장 옆에 살 순 없다고 해서 이사했다네. 믿기셔??
반은 바로 옆동네로 반은 울마을로.
이사를 할거면 기왕에 이런 구석으로는 하지 말았더라면 훨 좋았을텐데..ㅠ.ㅠ;)

경북 의성군 금성면 하동(울마을)

경북 의성군 금성면 도경동(도경은 뭐지?? 그나저나?? 못 들었는데.)


아주 신씨 (鵝州申氏)

1> 시조 : 신영미(申英美)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아주는 경남 거제군에 속했던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걸현이었고 경덕왕때 아주로 고쳐서
거제에 속하였다.

일부에는 신익휴를 평산신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시조로 기록되어있다
그는 고려때 금자광록대부로 문하시랑에 오르고 나라에 공을세워 아주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익휴(益休)를 시조로 받들고 평산신씨에서 분적하여 아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나, 그러나 조선 순조때 사람인 신정주(申鼎周)가 저술한 [호서기행]에 의하면
1817년 공주의 김노정(金魯定)이 [만성보]를 만들때 신익휴라는 가공적 인물을
평산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과 연계시켜 위조했다고 하며,
영조때 편찬된 [문헌비고]와 1924년에 발행된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아주신씨의 가첩에는
고려 때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인 신영미(申英美)가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아주신씨의 가첩 등을 근거로하여 신영미를 시조로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호장(戶長) 영미(英美)의 현손 우(祐)가 고려말에 사헌부 장령과
전라도 안렴사를 역임했고, 아버지가 죽자 여막에서 3년간 조석으로 호곡하여 무덤앞에 쌍죽이
돋아났다고 하며,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지고 그가 살던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불렀으며
효행을 돌에 새기고 [삼강행실록]에 기록하였다

한편 우(祐)의 7세손 원록(元祿)은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자
찾아가 문하생이 되고, 동료들과 장천에 서원을 세우고 장천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효행이 지극한 그는 아버지가 병이 들자 수백리를 걸어 팔공산에 가서 약초를 구하여
8년 간이나 밤낮으로 간병했고, 어머니가 죽자 눈비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세번씩 3년동안
성묘를 하여 효행으로 나라에서 효자문이 내려졌으며, 그가 손자 적도(適道), 달도(達道),
열도(悅道) 3형제가 모두 정묘호란에 공을 세워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몽득(夢得)의 아들로 학명을 떨쳤던 지효(之孝)와 창녕부사를 지낸
지제(之悌)의 형제가 유명했으며, 지제의 아들 홍망(弘望)은 사헌부에 재직중 도승지 이시모의
탄핵으로 벽동에 유배되었다가 효종때 지평과 풍기군수를 지내고 문집을 남겼다.
삼강록에 행실이 기록된 지익(之益)의 손자 응태(應泰)는 학문이 뛰어나 [사서제요 ]와
[천명태주도]등의 저서를 남겨 아주신씨의 가통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아주신씨는 남한에 총 6,338가구, 26,2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북 의성군 사곡면 매곡동
경북 의성군 의성읍 팔성동

경북 의성군 금성면 하동
경북 의성군 금성면 도경동